21세기 바다마녀
- 주-문- 인간 다리 한 쌍, 주-문- 인간 다리 열세 쌍, 주-문-, 주-주-문-문, 주주주주문문문문……
“나 안 해!”
주문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들어오는 동안, 바다마녀는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나 안 해!’를 외쳤다.
“나 안 해! 못 해! 왜 해!”
바다마녀의 아름답고 웅장하고 걸걸하고 카랑카랑하면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실험 동굴 속으로 퍼졌다. 그동안 바다마녀가 <사이보그 인어 연구소>의 <목소리 아카이브>에 기증 받은 성대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가동한 것이다.
이 목소리들을 얻기 위해 무슨 일까지 했던가? 인어 왕가의 막내 공주를 위해 자신의 문어 다리 여덟 개 중 두 개를 떼어 인간의 다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바다마녀에게 돌아온 것은 연구소의 연구 예산 전액 삭감 조치였다. 인어 공주 자매들의 헤어스타일을 상큼한 짧은 머리로 바꿔준 게 도대체 무슨 잘못인지 바다마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인어 왕자들의 낮아지는 혼인율까지 왜 바다마녀 탓을 하느냔 말이다.
당시에 연구원 대부분이 연구소를 떠났고, 한 자리에 붙어있길 좋아하는 충성스러운 히드라와 말미잘들만이 연구원으로 남았다. 바다마녀는 오염 해수를 정화하는 해수청정기라거나, 플라스틱 쓰레기에 걸리는 걸 방지하는 지느러미 방어크림이라거나, 아가미 마스크, 낚싯줄 감지기 등을 만들어 팔아가며 겨우 버텨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인간 다리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바다마녀의 메시지 창도 폭발 직전이었다.
- 인간 다리 대량 할인 요망. 공동구매 천 개 이상 가능.
- 어린이용 다리 할인 여부 문의합니다.
- 길고 쭉 뻗은 인간 다리는 더 비싼가요?
- 저는 아무 다리나 괜찮습니다. 빨리만 해 주세요. 털 많은 다리도 환영.
- 저 먼저 해주세요. 따블!
- 난 따따블!
- 따따따따따……
“놀고들 있네.”
바다마녀는 코웃음을 쳤다. 인어들이 인간 다리를 원하는 이유가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인간 왕자의 사랑을 이용해서 죽지 않는 영혼을 얻겠다는 막내 공주의 목적은 숭고하기라도 했다. 지금의 인어들은 바다를 버리고 자기만 인간이 되어 뭍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작정인 게다. 인간, 인간이 되겠다니! 플라스틱, 기름 덩어리, 썩어가는 각종 쓰레기, 썩지도 않는 각종 쓰레기에 이어 이제는 망가진 핵발전소 방사성 폐수를 바다에 퍼부어 버리는 그 무책임하고 가증스럽고 구역질나고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려는 일에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보탤 순 없었다. 바다마녀는 더 이상 인간 다리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리의 대가가 억만금일지라도. 최고의 성대, 매혹적인 입술, 먹어도 살 안 찌는 소화능력일지라도.
바다마녀가 굶주림에 몸부림치게 된 건 채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안 먹어도 배 안 고픈 능력을 준다면 다리 두 개가 아니라 지네 다리 세트라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던 그때, 수석연구원 히드라가 어떤 인어를 만나보라고 제안했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어는 만나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바다마녀였지만, 그 말을 할 기운이 없어서 얼결에 만남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인간 다리는 만들지 않아.”
“저도 인간 다리는 원하지 않아요. 인간은 역겨우니까요.”
“흠. 말이 좀 통하는군.”
뒤돌아 있던 바다마녀가 그제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인어를 쳐다보았다. 성별을 알 수 없고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무뚝뚝한 인어가 말을 이었다.
“네 발 동물의 다리는 만들 수 있나요? 이왕이면 말이면 좋겠는데요. 켄타우로스처럼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어렵다면 개 다리도 좋아요.”
“어렵긴! 나한테 어려운 건 없어. 그냥 하기 싫을 뿐이야. 인간이 사는 뭍이 어떤 곳인지는 알아? 반인반수나 반인반개인 채로 인간의 눈에 띄면 어쩌려고? 동물원에 갇히거나 연구 대상이 되고 말 거야.”
“혹시 못 만드는 건 아니고요? 다리 재료가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 아니, 누가 그래?”
바다마녀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로 화를 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다리를 만들려면 다리가 필요하다. 바다마녀는 예전에 수많은 인어들에게 인간 다리를 만들어주면서 오징어, 문어, 쭈꾸미들의 다리를 재료로 이용했기 때문에 그들과 원수가 된 지 오래다.
“사실인 모양이군요. 저는 다른 생명체의 몸을 이용해서까지 다리를 가질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다리의 재료를 구해다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난 싸구려는 안 써.”
“물론이죠. 다리의 재료로는 인간의 다리가 최고 아니겠어요? 인간들 중에 인어가 되기 원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뭐? 인간들 지들이 바다를 망쳐놓고선 바다에서 살겠다는 거야? 제정신이야, 뭐야?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뭍의 세계에서는 더 살기 어려워질 거예요. 덥고, 춥고, 가물다가 홍수 나고, 공기 더럽고, 해수면이 점점 상승하면 머지않아 육지도 없어질 테지요. 결국 싫으나 좋으나 모두 바다에서 살게 되는 거죠.”
바다마녀는 생각에 잠겼다. 인간에게 물고기 하반신을 주려면 물고기 몸이 필요하다. 멀쩡한 물고기들을 희생시킬 순 없으니 인간이 되려는 인어들을 써먹으면? 써먹는 게 아니지, 인간은 인어로, 인어는 인간으로 신체 스와핑을 해 주고 돈을 따블 또는 따따블로 벌고……, 아니지, 아니야.
“나 안 해.”
바다마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인어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키기로 했다.
“저도 반대예요, 인어의 인간화는요.”
무뚝뚝 인어가 말했다.
“제가 아는 친구들 중에 미식가 상어들이 있거든요. 바다에서는 웬만한 건 다 먹어봤고 인간도 먹어봤는데 맛있었나 봐요. 배불리 먹어보고 싶어하더라구요, 인간을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뭍에서 사는 편이 낫겠죠.”
“인간에게 상어의 꼬리를 주고, 상어에게 인간의 다리를 주자는 말인가?”
“그렇죠. 그런 건……, 아무래도 안 되겠죠?”
“안 되긴! 뭐, 많이 힘들겠지만 이 바다마녀가 못하는 건 없어!”
바다마녀가 한이 서린 득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 틈에서 상어 인간이 활개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통쾌했다.
“다 잡아먹어 버리면 좋겠네. 바다를 더럽히는 인간들 말이야!”
바다마녀가 아름답고 웅장하고 걸걸하고 카랑카랑하면서 감미롭게 말했다. 무뚝뚝 인어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는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에필로그] 수입은 오대 오로 나눠요. / 무슨 소리? 칠대 삼. / 제가 칠인가요? / 니가 뭘 한다고? 일은 내가 다 하는데! 게다가 나는 히드라, 말미잘들 월급도 줘야 한다고! / 일거리는 제가 가져와야 하는 걸요? 그리고 아까부터 왜 반말을 하시죠? / 앗, 죄송, 그래도 칠대 삼은 양보 못 해요. / 육쩜팔육 대 삼쩜일사는 어때요? / 안 해! 계산 못 해!……
@정재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