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가족과 함께한 여행 마지막날, 공항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파리 북역 플랫폼에 도착했다. 플랫폼 벽에는 긴 광고판 같은 설치물이 연이어 붙어있었다. 맨 위 사진이 그중 일부로, 열차로 가려지기 전에 (나 말고 딸이) 재빨리 찍은 것이다.
사진 속 수식은 대기중 수증기량에 관한 식이다. 파리 북역에는 이 식 말고도 대기의 상태를 계산할 수 있는 각종 식 수십 개가 설치되어 있다. 설치물 제목은 ‘논리적 기반(The Logical Basis)’.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기념하며 기후 과학의 과학적 근거를 통해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설치 예술이었다고 한다. 공항 가는 도중에 검색해서 알아냈다.
글자나 그림이 아니라 수식을 대문짝 만하게 걸어 놓다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잡한 수식들 앞에서 멈춰서거나 외면했을 것이다. 뭔 소린지 알아챌 수 없어서 불편했을 것이다. (고백하건데, 대학 때 잠시 관련 공부를 했던 나도 저 수식들이 익숙하다고 느끼면서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으흑. 그래서 이중으로 불편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누군가는, 저 수식들을 바탕으로 기후에 대해 연구하고 날씨를 예보하고 있다. 내가 읽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월의 첫 여행지는 체코 프라하였다. 여행 첫날, 프라하 한복판의 서점에 들어가서 카렐 차펙의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R.U.R)> 체코어로 된 책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래픽노블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걸 샀다. 사실 한국에 그 책의 번역본을 갖고 있었음에도 원본을 또 산 거다. 그래서 그 묵직한 책을 여행지 내내 끌고 다녔다. 위 사진에서 왼쪽이 체코에서 산 체코어 책이고, 오른쪽이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다.
읽지 못하는 책을 사는 취미가 있다. 딸이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는 읽을 줄 모르는 텍스트가 많다는 걸 알려주겠다는 핑계로, 다양한 언어로 된 그림책들을 사 모으곤 했다.
요새는 예전에 비해 번역 앱도 훌륭하고 인공지능도 많은 걸 알려주기에, 외국어에 대한 장벽이 낮아진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읽지 못하는 글자마다 구글 렌즈를 들이대서 대강의 뜻을 알아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 되게 귀찮다!
읽지 못하는 텍스트를 마주해 보자. <R.U.R>은 번역본도 있어서 뜻을 바로 알 수도 있었지만 그저 잘 모르는 글자 자체를 보는 느낌도 괜찮았다. (사진에서 잘 보일지 모르겠지만, 두 책의 색감이 살짝 달라서 분위기도 차이가 난다.)
여행 다녀온 지 몇 주 지난 후, 인터넷에서 내가 읽을 줄 모르는 책을 검색했다.
이란 초등학교의 페르시아어 교과서 표지들이다. (출처: shopipersia 사이트)
읽을 수는 있지만 도저히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 없는 아무말들, 지들끼리만 알아듣고 낄낄거리기 위한 언어들, 잘못 해석했을까봐 겁내며 봐야하는 상징 가득한 뮤직비디오나 쇼츠 등을 뒤로 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는 것밖에 모르는 페르시아어를 가만히 마주해 본다. 교과서 읽기를 배우던 아이들을 떠올려 본다. 교과서를 펴놓고 공부하기 싫어서 꼼지락거리며 딴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전쟁이 세상에서 앗아간 그 눈동자들을.
세상에는 내가 읽을 줄 모르는 문장들을 진지하게 읽고 쓰는 사람들이 있다. 더 많이 읽으려 노력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가 읽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읽을 줄 모르는 텍스트와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엉뚱하게도) 꾸준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SF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엔 읽히거나 읽히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 보너스: 다음은 카테르지나 추포바가 그린 그래픽노블 <R.U.R>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여기 쓰인 문장은 무슨 뜻이게요? (체코어 잘 읽는 분들도 많겠지만 저는 읽지 못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