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해 전쟁을 일으킨 지 두 달이 넘었습니다. 전쟁의 첫 소식은 이란 남부의 한 여자 초등학교가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어린이들을 포함해 170여 명이 사망했다는 비보였습니다. 그 후 전쟁에 대해선 주가, 유가 등 주로 경제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보도하여 이 전쟁으로 희생된, 무고한 생명과 환경에 대해선 알기도 어렵습니다. 언론은 권력자들의 입장만 앵무새처럼 전하여, 세상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목소리로 가득차고 있습니다. 이 땅의 어린이, 청소년, 어른, 동식물, 모든 존재들이 조금이라도 전쟁과 폭력의 잔인함에 무뎌지고 기만적인 논리에 현혹될까봐 두렵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존중과 평화의 소리가 절실해져서 김이구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생각났습니다. 2026년 4월 25일 토요일에 정재은, 오세란, 김태희, 이퐁, 심지섭, 최배은은 사과꽃이 가만히 피어있는 김이구 선생님 묘소에서 선생님이 들려주신 평화에 대한 글들을 나누었습니다. 아래에 그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부디 생명과 존재를 함부로 여기는 자들의 큰소리 대신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이 널리 퍼지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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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생각하다 『통일은 참 쉽다』(민족문학작가회의편·이오덕 엮음, 도서출판 산하, 1991)에 실린 김이구 선생님의 동화 「현수의 하루」를 다시 읽었습니다. 과수원과 책이 등장하는 이 동화는 김이구 선생님의 어린 시절을 짐작하게 합니다. 현수는 엄마 심부름을 하지 않고 몰래 장에 갑니다. 책장수 부부에게 가서 책을 사기 위해서였죠. 거기에서 학교 친구 순택이와 마주치는데요, 학교에서는 거의 말을 나눠본 적이 없지만, 서로 다른 책을 사서 바꿔보기로 하면서 현수와 순택이는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며 숙제 이야기와 책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근데 현수야, 너네 집엔 책이 많지?” “무슨 책?” “잡지나 동화책, 만화책 같은 거.” “형들이 보고 상자에 넣어 둔 것도 있고 내가 모은 것도 있고 그래.” “나한테 좀 빌려 줄래? 우리 집엔 책이 별로 없어.” “그래. 하지만 찢거나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된다.” “알았어. 깨끗이 보고 돌려 줄게.” 순택이는 기분이 좋은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185쪽)
책을 찢거나 잃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현수의 모습에서, 엉뚱하게도 지난 2월 28일 폭격 당한 이란의 샤타레 타예베 초등학교가 떠올랐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훼손된 벽화, 그 엉망진창 틈바구니에서 아이의 자그마한 백팩을 건져올리는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아이들의 책이 찢기거나 피에 물들지 않는 것, 아이들이 책을 통해 관계를 맺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것, 그러한 평범해 보이는 상황을 지키는 것이 평화가 아닐까요.
* 페르시아어 ‘샤타레 타예베’는 ‘좋은 나무’ 또는 ‘아름다운 나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좋은 나무, 좋은 책, 김이구 선생님……, 그리고 평화를 떠올리며, 평화를 위해 애쓰겠다고, 책을 찢거나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정재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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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꼭 몽실이처럼 생겼습니다.” 지지난해(2000년) 1월 일본 코오베에서 만난 변기자 선생은 세미나에서 발표하던 중 웃으면서 자신의 모습이 몽실이를 꼭 닮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새삼 바라보니, 복스런 얼굴에 좀 펑퍼짐한 스타일의 아줌마인 변기자 선생은 과연 ‘몽실 언니’ 같기도 했지만, 몽실 언니를 아무도 직접 본 사람은 없으니 얼마나 근사할지를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변기자 선생은 2000년 『몽실 언니』를 일본에 번역 소개한 재일동포 번역가이다. (…) 이분들이 한국(남한)에 올 수 없었던 것은 일본 패전 직후 조선인으로 국적이 회복된 뒤 북한으로도 남한으로도 국적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식민지배를 벗어나 비로소 조국을 찾은 뒤, 그 조국이 두 개로 갈라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세상은 참으로 냉정하다. 아직도 이땅엔 이런 장벽이 많고, 가고 싶은 곳을 못 가게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게 만드는 그 장벽을 우리는 쉽사리 허물지 않는다. 변기자 선생은 이번 첫 한국 방문에 아버지의 고향 대구와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이 계신 안동, 그리고 ‘종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무덤이 있는 ‘망향의 동산’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일본에서 날아온 ‘몽실 언니’가 마음껏 우리 아동문학을 사랑할 수 있고, 갈라진 조국의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가슴아파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믿어도 될 것인가? (『어린이문학을 보는 시각』, 327-329쪽)
이 글은 2002년 대산문화 7호에 김이구 평론가가 『몽실 언니』의 일본어판 번역자인 변기자 선생을 유머를 담아 소개하며 시작했지만 사실은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자유롭게 삶의 자리를 이동할 수 없었던 재일동포의 사연에 대해 쓴 글입니다. 서두의 유머가 김이구 선생님의 모습을 닮아 살짝 웃음 짓게 되고, 계속 읽으며 선생님의 나직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도 떠오르는 글입니다.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건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존재를 조명하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가져온 글을 읽으며 저는 김이구 평론가의 평화를 지향하는 마음에는 사람이 중심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더불어 책을 소개하는 비평에는 작품과 작가의 이름이 항상 나오기에, 비평은 사람과 사람을 엮는 글이라는 점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엮는 비평의 길을 앞서 걸은 선배 평론가를 떠올리며 저도 사건이라는 중립적 사건에 묻힌 생명의 가치를 찾는 비평을 쓰기로 다짐해 봅니다. (오세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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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토요일, 김이구 상무님을 뵈러 다녀왔다. 우리는 이제 봄소풍 삼아 예산 과수원에 다녀가는 것 같다. 준비도 알아서 척척이다. 기차표 예매를 미리 해놓는 사람(정재은)이 있고, 김이구 선생님의 글 가운데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제안하는 사람이 있다. 올해는 최배은 선생님이 전쟁과 평화에 대해 나눠 보자 하셨다. 나는 늘 그렇듯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다가 닥쳐서야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글은 왠지 「김이구의 동시동심」에 많을 것 같아, 유고 평론집 『동심이 발견한 세상』을 다시 읽어 봐야지 했는데, 아뿔싸 그만 회사에서 안 가져왔다. 오랜만에 온라인에서 김이구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젊다. 비현실적으로. 젊어진 것이 아닐 텐데 낯설 정도로 젊은 김이구 상무님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 내가 나이가 든 거구나. 벌써 9년. 내년이면 10주기가 되고, 곧 있으면 내가 상무님 나이가 될 테지.
평생 편집자 김이구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김혜진 소설가가 지난해 펴낸 편집자에 관한 소설 『오직 그녀의 것』 작가의 말에 김이구 선생님의 『편집자의 시간』이 언급되고 문장들이 인용되었다. 뒤늦게 펴낸 책이 이런 식으로 회자되니 안심이 된다. 오래오래 많은 이들이 그분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봄소풍에서 김이구 선생님의 글과 그분과의 추억을 나누는 것은 우리도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분과 얽힌 웃기고 재미난 추억담, 그분이 남긴 글들을 아껴 가며, 때로는 되풀이하며 해마다 계속 선명한 기억을 쌓아 가고 있다. 문학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롭게 읽힌다는 것이다. 명분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이구의 동시동심」을 천천히 읽다 보니 역시나, 전쟁과 평화에 관한 해설이 많았다(이 꼭지는 한국일보에 2015년 10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격주로 연재된 동시 에세이로 『동심이 발견한 세상』 1부에 실려 있다). 신기한 건 전쟁이나 평화로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시들조차도 김이구 평론가의 눈을 거치면 평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읽은 글들인데 전쟁을 겪는 중에 들여다보니 그 전과는 다른 기분이 든다. 내가 고른 글은 「껴안는다는 것」으로 정유경 동시 「까만 밤」에 대해 쓴 글이다.
빨강, 노랑, 파랑이
폭 껴안아
검정이 되었대.
깜깜한
밤
오늘 이 밤엔
무엇, 무엇, 무엇이
꼬옥
껴안고 있을까?
밤이 사라진 시대다. 도시고 시골이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가게의 조명과 전광판, 텔레비전의 번득임이 밤을 지배한다. 달빛을 몰아내고 별빛을 몰아낸다. 스마트폰의 빛이 너와 나의 얼굴을 비춘다. 사람들은 일부러 깜깜한 밤을 찾아 나서고, 깜깜한 밤을 유영하는 반딧불이를 만나러 멀리 떠나야 한다. 깜깜한 밤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달빛도 별빛도 불빛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의 고요 속에서 아이는, 동심은 “무엇, 무엇, 무엇이/꼬옥/껴안고 있을까?” 의문을 품는다. 의문이라기보다 꼬옥 껴안고 있는 존재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끼고 있다. 세상만물, 삼라만상이 침잠하는 평화의 시간이다. 그 시간에 대한 염원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껴안으면 되니까. 빨강, 노랑, 파랑은 목적어가 아니고 주어이다. 내가 껴안고 네가 껴안고 그가 껴안고, 서로 포옥 껴안아 깜깜해지면 된다. 내전으로 매일 수천 명의 난민이 국경을 넘고 성지순례 참사로 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바람 잘 날 없는 지구. 껴안으면 깜깜해지노니, 낮의 시간이 아니라 깜깜한 밤의 시간이 와야겠다. (16쪽)
이 작고 귀여운 시 어디에서 전쟁과 평화를 생각한 것일까? 김이구 선생님은 편집자 출신답게 맞춤법으로 시작한다. 칠흑을 “칠흙으로 쓰는 사람도 있”다면서(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러고는 과학적 논리에 근거해 색의 삼원색으로 이 시를 설명한다. 빨강, 노랑, 파랑색이 “폭 껴안아/검정이 되”는 것이라고(확신의 T). 곧이어 감성 한스푼을 담아 “껴안지 않고 따로 놀아서는 검정이 되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위의 글을 천천히 읽고 나면 이 시의 품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김이구 선생님이 말한 대로 “꼬옥 껴안고 있는 존재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끼”는 것이 참평화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궁금하다, 지금 미국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행태를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실지. 몹시 궁금하다. 궁금해서 못 참겠다.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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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사과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과수원에서 김이구 선생님을 뵙고 왔어요.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가는 요즘, 김이구 선생님이 계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평론집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에서 오늘날과 거울처럼 닮은 현실에 대해 언급하신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폭격 구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 곳을 바라보는 여섯 명의 사람들을 찍은 흑백 사진을 먼저 제시하는데, 사진 아래에는 “2009년 1월 1일, (…)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가 공습당하는 광경을 망원경 등으로 구경하고 있다.”라는 설명 글이 붙어 있다. 사진 옆에 있는 저작권 표시를 잘 살펴보면 로이터통신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도시락까지 준비해 온 구경꾼들로 북적”댄 그날, “폭격으로 검은 연기가 치솟으면/브라보, 브라보!/그 사람들은 소리쳤다”고 시행은 사진의 상황을 좀 더 부연해서 전한다. 이어지는 “그날은/새해 첫날이었다./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라는 마지막 연 역시 기사문처럼 건조한 문장이지만, 평화로워야 할 새해 첫날에 폭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이를 구경하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대비하는 극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독자는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공습과 이를 구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전율하며 느끼고 분노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나 자신은 과연 이 사태와 무관하다 할 것인지와 같은 더 넓고 깊은 성찰을 하도록 자극한다. (137쪽)
선생님은 ‘다큐멘터리 동시’를 줄여 ‘다큐동시’로 명명하고 남호섭 시인의 이러한 시도가 ‘치열한 시정신과 방법적 모색이 만났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성과’라고 평가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동시의 가벼움에 기여하는 작품도 소중하지만 동시의 무거움에 기여하는 작품도 꼭 필요하다’(141쪽)는 문장도 여러 번 곱씹게 되더라고요.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창작된 ‘다큐동시’도 만나고 싶어지네요. 무엇보다 전쟁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어요, 제발! (이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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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길
권태응
두멧골 오솔길 가닥배기 외로 갈까? 바로 갈까? 어떤 길이 어디멘지 알진 못해도 자꾸 따라가면은 집 있겠지요. 바위 밑에 짐을 놓고 피란군들이 어린 애기 달래면서 물을 마시네.『산골 마을』(1950)
두메산골 오솔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왼쪽 길로 갈까 오른쪽 길로 갈까 망설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피란군’이라 했지만 군인들은 아니고 보통의 ‘피란민(避亂民)’이다. 이고 지고 오던 무거운 짐을 바위 밑에 잠시 내려놓고, 울고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면서 물을 마신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지만 어느 길이든 “자꾸 따라 가면은/집 있겠지” 하는 어렴풋한 희망을 품는다. 난리가 터진 세상을 피해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도정에 생성된 평화와 고요가 한 폭의 그림으로 찍혀 있다. (동심이 발견한 세상』, 59-60쪽.)
전쟁 소식을 들을 때면 전쟁을 겪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속상하기만 합니다. 김이구 선생님은 작품에 담긴 사람들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읽어내는 글들을 쓰곤 하셨는데요. 선생님의 글들을 읽다 문득 저는 서평과 평론에서 한번도 평화라는 단어를 언급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소박함과 고요함, 평화와 같은 단어들을 쓰곤 하셨던 김이구 선생님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심지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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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윤석중
길가에, 방공호가 하나 남아 있었다. 집 없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거적을 쓰고 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이 하나가 제비 새끼처럼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독립은 언제 되나요?" 『초생달』 (박문출판사, 1946)
(…) 「독립」은 해방 후에 쓰인 작품이다. 일제의 압제는 물러갔어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다리 밑이나 일제 말에 만들어진 방공호 같은 데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시인은 그런 형편을 직시하면서 방공호 속에서 거적을 쓰고 사는 한 아이를 주목한다. 그 꼬마 아이는 둥지 속의 “제비 새끼처럼” 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독립은 언제 되나요?” 읽는 순간 흑백사진 같은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시이다. 아이의 엉뚱한 질문은 해방이 된 상황을 모르는 아이의 천진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 천진성의 이면에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건만 민중의 삶은 여전히 해방 전과 다름없이 피폐하다는 진실이 숨어있는 바, 아이가 던지는 질문은 통렬한 역설이 된다. 따라서 제비 새끼로 비유된 아이의 형상도 귀엽기보다 애처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 「독립」의 아이가 2017년 오늘 광화문 광장에 다시 나타난다면 ‘민주공화국은 언제 되나요?’하고 묻지 않을까. (『동심이 발견한 세상』, 110-112쪽.)
윤석중의 「독립」이란 시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이의 천진한 시선과 질문이 던지는 힘을 새삼 느끼면서, 김이구 선생님처럼 「독립」의 아이가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던질 질문을 상상했다. “전쟁으로 평화가 오나요?" (최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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