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된장!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된장, 된장. 그래봤자 내 말을 받아줄 로벌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 벽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된장 말씀이십니까? 카보니안들의 된장에는 재래된장, 미소, 청국장, 막장 등이 있습니다. 실리시안들도 된장을 만들어서 빵에 잼처럼 발라먹길 즐깁니다. 어떤 된장을 원하십니까?
- 누구시죠? 그런데 뭐라고? 실리…인들도 된장을 먹는다고? 도대체 그 된장은 뭘로 만든다는 거지?
- 실리시안들이 먹는 된장의 주재료는 장석입니다. 거기에 휘석 배합 정도에 따라 된장 종류가 달라집니다. 카보니안들의 된장이 밀웜과 굼벵이의 적절한 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뭐? 굼벵이? 메주를 콩으로 쑤지 않는다는 건가!
- 메주 말씀이십니까? 메주는 메주리에서 만듭니다. 콩으로 메주를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일단 메주리 근처 황무지에서 4월에 콩을 심은 다음에……
- 저기요, 말 끊어서 미안한데요, 메주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내가 좀 급하거든? 거기가 누군지 몰라도 날 도와줄 거 아니면……
- 저도 말 끊어서 미안한데요, 도와주는 게 제 일입니다. 마침 제가 페르멘타 행성의 정착 도우미 ‘자이모라’거든요. Zyme(발효) +Aurora(새벽)의 느낌으로 ‘발효 행성의 새 시대를 여는 AI’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저 멀리 다른 행성의 친구 챗지피티가 지어줬죠.
- 쳇! 챗이라고? 내 컴퓨터가 켜지기만 하면 챗뭐시기 같은 거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야. 내가 가져온 기계들에서 젤리 같은 점액이 흘러나오고 있거든.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컴퓨터, 그리고 구식 게임기와 전기밥솥까지 몽땅 다 끈적끈적해. 만지기도 찝찝하고 켜지지도 않는다고!
- 아하.
- 아하는 무슨! 그래서 로벌하고 연락을 할 수가 없어. 페르멘타 입성장에서 그들이 로벌을 데리고 가버렸어. 난 당연히 로벌은 내 동반자라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소용없었다구. 로벌은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있고, 로봇이야. 나 좀 도와줘, 자이모라. 안 그러면 챗지피티한테 일러 버린다!
그때 내 뱃속에서 꼬로록 소리가 났고,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이 먹을 게 잔뜩 실린 카트 여러 대가 내 앞에 등장했다. 나는 일단 파란빛 크리스탈 잔에 담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점차 기억이 몽롱해졌다. ‘뭘 좋아할 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이 근사한 술은 뭐야?’, ‘아, 그거 백 년 발효된 곤충주야. 무슨 곤충이냐 하면…’, ‘말하지 마, 알고 싶지 않아! 그냥 한 잔 더!’ 그러면서 무슨무슨 김치, 어쩌구저쩌구 치즈, 각종 된장 요리를 먹었던 것 같고, 매콤시큼짭짤한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매콤시큼짭짤한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도 같다.
몇 시간 전, 우주 항해중이던 로벌과 나는 페르멘타 행성에 내렸다. 우주선에서 진행된 페르멘타 설명회에서 나는 페르멘타가 발효가 왕성한 행성이라는 점에(맛난 발효식품을 왕창 먹을 걸 기대했다!), 로벌은 지구인 종족 말고도 다른 종족이 동등하게 사는 곳이라는 점에 (아무래도 지구에서 로봇으로 사는 게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끌렸다. 그래서 이곳에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행성에 들어오는 입성장에서 로벌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며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였다.
- 삑! 실리시안은 반대쪽으로 가세요!
- 네? 실리시안이 뭔데요? 로벌은 제 동반자니까 저랑 같이 다녀야 한다구요!
- 실리시안은 규소형 생명체입니다. 글.로.벌 님 맞죠? 글로벌 님은 규소체로 확인되네요. 실리시안들이 살고 있는 마그마르 섬에 정착하도록 잘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치 돌로 된 나무처럼 생긴 종족이 와서 로벌의 휠체어를 밀고 가버렸다. 내가 우주복 헬멧을 고쳐쓰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짐을 찾아서 로벌에게 스마트폰으로 연락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임시 숙소까지 오면서 택시 기사에게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페르멘타에는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처럼 탄소 기반 생명체인 ‘카보니안’과 규소 기반 생명체인 ‘실리시안’들이 산다. 몸이 광물로 이루어진 실리시안들은 화산섬인 마그마르섬에 거주한다고 했다. 그런데 로벌의 두뇌와 신경을 이루는 각종 프로세서, 메모리 칩, 집적회로 등의 반도체가 모두 규소(실리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실리시안으로 분류된 모양이었다. 페르멘타에 실리시안이 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로벌을 그리로 모셔갔을 거라고 했다.
- 루미, 정신이 좀 들어?
- 누구시죠?
- 나는 페르멘타 행성의 정착 도우미 자이모라. 너는 지구에서 온 카보니안 글루미.
- 너 언제부터 반말 했어?
- 아까 네가 두리안주 마실 때부터. 나는 맞춤형 AI라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네 말투를 따라하게 되어 있어.
- 그렇구나. 이제 기억났어.
자이모라와 대화하며 얼큰하게 취한 나는 포카치아 조각을 간장에 찍어 먹으며 마그마르섬이 어떤 곳인지 물어봤었다. 그런데 그곳이 펄펄 끓는 용암이 샘솟는 곳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로벌은 뜨거운 것엔 트라우마가 있을 텐데! 엉엉, 로벌! 로벌을 구하러 가야하는데, 나도 뜨거운 건 무섭단 말이야…….
- 거기까지 생각 나.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네.
- 깜빡은 무슨. 코까지 골며 잘만 자던데. 너 방부제 얘기도 기억 나?
- 응. 그러니까 네 말은, 페르멘타에서 카보니안과 실리시안은 기본적으로 따로 살지만 미생물들은 양쪽이 섞여있기 때문에 반도체도 썩는다는 거지?
- 썩는 게 아니라 발효되는 거지. 그래서 네가 가져온 밥통 같은 기계들에 들어 있는 칩들이 발효되기 시작하면서 끈적해진 거야.
- 하지만 살아있는 건 발효되지 않으니까 작동하는 로봇은 괜찮을 거란 말이지?
- 그래. 그러니까 네 로봇인 로벌은 무사할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로벌을 찾으면 반도체에 방부 처리를 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칩에도 방부 처리가 되어 있어. 실리시안 AI에도 마찬가지고.
실리시안들이 사용하는 AI를 이루는 칩은 탄소 기반 물질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이곳은 정말 흥미로운 행성임에 분명하지만, 나는 알면 알수록 걱정이 늘어만 갔다. 로벌은 최근에 생각하거나 말하다가 멈칫거리는 적이 많았다. 그게 작동을 멈추는 걸로 여겨져서 이미 미생물의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로벌 생각을 하니 또 슬퍼져서 술잔을 들려는 나에게 자이모라는 호통을 쳤다. 방부제를 사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맞춤형 일자리를 구해놨으니 서둘러 메주리로 가라고 했다.
- 메주리? 날더러 메주리에서 일하라고?
- 네가 원한 거잖아. 된장 만들고 싶다고. 콩도 심는다며!
이런 된장. 하지만 자이모라의 의견에 따르는 것 말고 별다른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서 나는 일단 메주리에서 일하며 뒷일을 도모해 보기로 했다. 숙소를 비울 때는 발효가 시작된 기계들이 들어 있는 상자에 자물쇠를 채우는 걸 잊지 않았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들어 있는 희토류를 노리는 좀도둑들이 있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다. 네오디뮴이나 세륨 따위의 희토류가 실리시안들에게는 매우 인기있는 향신료라 비싸게 팔린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옥상에서 메주를 떨어뜨리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밤마다 맥주와 치즈김치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몸이 무거워지는 듯해서 자발적으로 계단을 걸어올라 더 높은 옥상으로 갔다. 그곳에선 옆마을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 옆마을은 막걸리를 빚는 누룩골이라고 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따 지나가는 척하면서 저기 가면 막걸리를 얻어 먹을 수 있을까?
그때 커다란 막걸리 항아리가 줄지어 선 한쪽에서 휠체어에 앉아 항아리 쪽으로 몸을 기대고 있는 로봇이 보였다. 로벌! 로벌이 분명했다. 나는 어느새 솟아난 곰같은 힘으로 곁에 있는 메주를 몽땅 던져버리고 계단을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른 누룩골로 가서 막걸리, 아니 로벌을 만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