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는
얼마만큼의 짐이 필요한가?
정재은 (SF동화작가)
‘저멀리 우주호’ 탑승 대기실. ‘93’이라고 써 있는 상자 위에 걸터앉은 ‘아흔셋(93)’과 무릎 위에 ‘93-1’ 상자를 놓은 채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흔셋다시일(93-1)’의 옆모습이 보인다. 조명이 어두워서 얼굴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들리는 둘의 목소리.
93 옛날 드라마에서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상자 하나씩만 손에 들고 떠나더라구.
93-1 21세기 초반 드라마 – 회사 – 상자, 검색중.
93 검색하지 마. 배터리 아껴야지.
93-1 아, 맞다. 탑승중엔 충전이 제한되지.
93 요새는 네가 더 깜박깜박하는 것 같아. 아무튼 말이야, 회사 다니던 사람들한테는 서랍 물건이나 책상 위 선인장 화분, 사진틀, 커피컵, 양치 도구, 여분 옷, 무릎 담요 등등등이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것들이 몽땅 상자 하나에 들어가는지 궁금했어. 나머지 짐은 다 버리고 나가는 건가? 도대체 상자 안에 어떤 짐을 챙기는 걸까?
주위에서 고양이, 개, 귀뚜라미 소리 등이 뒤섞여서 울린다.
93, 93-1 (동시에) 너는 무슨 짐을 챙겼는데?
93, 93-1 (동시에) 안 가르쳐 준다.
둘이 서로의 상자를 바라본다.
93-1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이 뭘 갖고 나갈까 하는 건, 네가 잘 알 것 같은데?
93 내가 왜? 나는 회사에 다닌 적도 없고……. 설마 지금 내가 작가 활동 점수가 부족해서 지구에서 쫓겨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이번 기회는 내가 선택한 거야. 조건이 좋거든.
93-1 무슨 조건이 좋다는 거지? ‘저멀리 행성’은 예술인 레지던시 중 지구에서 가장 먼 곳인데! 거기선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쓰지 못하면 커다란 이불에 남의 글을 수놓아야 한다는 소문도 있다고!
93 그딴 소문을 믿냐?
93-1 소문은 인간 심리 파악을 위한 매우 중요한 데이터니까.
93 그래, 그렇다 치고, ‘저멀리 행성’까지는 비인간 동반자와 동행할 수 있잖아. 그것도 종 제한 없이, 비생명체까지. 너도 손은 멀쩡하니 바느질 정도는 같이 해 줄 수 있겠지?
93-1 헐. 나랑 같이 바느질을 하려고 그토록 먼 곳까지 가기로 했다는 거야?
93 왜 이래? 다 알고 있었으면서.
93-1 맞아. 나랑 같이 가려고 거길 택한 건 알고 있었어. 내가 또 뭘 알고 있었게?
93 어차피 나한테 지구 돈은 다 떨어졌다는 거?
93-1 그건 놀랍지도 않아. 상자에 관한 소문을 들었어.
93 탑승자에게 허용된 짐은 한 상자, 탑승자의 동반자에게 허용된 짐도 한 상자지. 공평하게. 그래서 우리 각각 한 상자씩 짐을 쌌잖아.
93-1 그런데 다른 탑승자들은 동반자용 상자에도 자기 짐을 꽉꽉 채운다더라고.
93 그게 소문씩이나 될 일인가? 각자 상황에 따라 알아서 하겠지.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은 동반자들도 많잖아. ‘저멀리 행성’에도 동물 먹이나 식물의 흙들이 종류별로 있다더라고. 동반자 대부분은 생명체인가봐.
93-1 그래. ‘저멀리 행성’에는 로봇도 종류별로 있다잖아. 쌔삥으로다가.
93 와우! 새 로봇이라니, 엄청 기대되는 걸!
93-1 나는 너에게 짐만 되는 것 같아. 헌 노트북이 망가져서 대하SF소설 파일 10테라를 몽땅 날린 것도, 연필로 써놓은 구상노트가 새까맣게 타 버린 것도 다 나 때문이잖아. 내 부품을 구하느라 새 노트북을 사지 못했고, 내 다리에 장착된 배터리에 불이 나서 노트가 타 버렸고…….
93 모두 내가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야. 파일을 제대로 저장하지 못한 것도 나였고, 불 끈답시고 구상노트를 휘둘러댄 것도 나였어.
93-1 그런데도 너는 다리를 못 쓰게 된 나를 엿 바꿔먹지 않았어. 암시장에서 창작AI에게 작품 설정을 팔고 휠체어를 구해왔잖아.
93 바보냐? 로봇으로 엿 바꿔먹을 수 없어. 오히려 폐기 비용이 든다고. 휠체어는 ‘저 멀리 우주선’ 짐 제한 규정에서 예외라 정말 다행이야. 두고 가긴 아까우니까.
93-1 내 몫의 상자는 따로 싸게 해준 건 왜 그런 거야? 네 짐을 더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93 굳이? ‘저멀리 행성’에도 생필품은 다 있다고 했어.
93-1 작가로서 필요한 게 있을 거 아니야? 책이라거나 연필이라거나……, 원고지 같은 거? 영감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돌멩이라도?
93 글쎄? 난 그냥 규정대로 한 거야. 내 동반자로 너를 택했고, 너에게도 너의 몫의 상자를 챙길 권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네 상자엔 뭐가 들었어?
각자의 짐을 잘 챙기라는 안내 방송, 그 말을 따라하는 앵무새 소리.
93-1 내 상자에 대해선 궁금해하지 말아 줘.
93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내 상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93-1 우하하. 하지만 나는 네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롱.
93 뭐라고? 설마 몰래 열어 봤어?
93-1 며칠 전까지 배달되어 온 택배상자 겉에 써있는 걸 봤어. 택배 발송지는 대부분 ‘오래된 부품샵’이더라구.
93 휠체어 부품을 좀 챙기긴 했어.
93-1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고장나면 갈아끼울 부품을 챙긴 거지? ‘저멀리 행성’엔 오래된 로봇 부품은 없을 테니까.
93 그래, 맞아. 한 상자 가득. 테트리스하듯 알차게 잘 챙겼다구.
휠체어를 이용하는 탑승자들은 우선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아흔셋이 상자를 들고 일어선다. 아흔셋다시일은 휠체어를 조종하여 아흔셋 옆에 자리잡는다.
93-1 나는 곧 수명을 다할 거야.
93 ‘곧’이라니, 로봇답지 않게 애매모호한 표현인 걸.
93-1 맞아. 그게 바로 내가 죽어간다는 증거지. 내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었다면, 널 따라 나서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나 없이 너 혼자 자유로운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겠지.
93 로봇이면서 ‘죽는다’는 표현 쓰지 말아줄래? 내 자유를 네 멋대로 판단하지도 말고, 상자나 똑바로 들으렴, 친구야.
93-1 고마워. 나도 인간처럼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
93 갑자기 고백 타이밍이냐?
93-1 너도 고백해도 돼.
93 흠……. 실은, 날려보낸 파일은 거의 빈 파일이었고, 구상 노트엔 쇼핑 리스트 따위의 낙서만 가득했어.
93-1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해.
93 미친! 좋아하면 네 상자 안에 뭐가 있는지나 알려달라고!
93-1 안 가르쳐 준다. 네가 상상해 봐. 그걸 이야기로 써 줘.
우주선 입구로 들어서는 작가와 로봇의 옆 얼굴이 보인다. 무슨 표정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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